선택에 따른 작용 반작용

작용 반작용의 법칙
A B 두 물체가 서로 작용을 미치고 있을 때 그 상호작용에 관한 법칙. 물체 A가 물체 B에 미치는 것을 작용, 물체 B가 물체 A에 미치는 것을 반작용이라 하고,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으며, 그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이다.

2011년 초에 교회를 안가기로 결심했다. 그 전에 심적으로 부담되는 상황들도 선택에 영향을 미쳤고 그 후에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극도로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는걸 두려워한다. 물론, 어느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게 지탄 받고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 하겠지만 그걸 견디는 힘이 부족한 것 같으며 내재적으로 그러한 상황에 놓이는 것에 대해 엄청난 부담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을 아는 지인과 이야기 했을 때 ‘착한 아이 증후군’ 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착한 아이 증후군
착한아이 컴플렉스 또는 착한아이 증후군(The Good Child Syndrome)는 ‘착한 아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혹은 스스로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 아이가 스스로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다른 사람으로 부터 비춰지는 나의 모습이 착한 아이로 보이기 위해 어떻게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선한 행동을 해여하며, 이에 부합되지 못 하고 비난 받았을 때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교회에서 내가 행하는 것들로 인해 내가 비난 받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때문에, 처음엔 그러한 이유로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주말 시간을 활용하여 다른 것들을 해보고 싶었다. 모태신앙 특성상 주말엔 항상 교회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다였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말할 때도 교회가 내 모든 것인양 대답을 하곤 했으며,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갑론을박을 하였을 때에 내 분에 못 이겨 친구 뺨을 때린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도 그때의 나의 행동은 단순히 분통함으로 인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는다.

여하튼, 그러한 나에게 교회를 안 나간다는 사건은 이례적인 것이다. 20여년의 생활이 교회와 점철 되었던 나인데, 교회를 안 나간다는 행위는 내가 기존에 생활했던 것들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과 연결된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내 생활이 그 곳에 있었으므로.

초반엔 주말에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 싶어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딱히 주말에 하는 것은 없었다. 기껏해야 연구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 뿐. 뭔가 애초에 생각했던 문화생활 같은 것은 이래저래 하지 못 했다. 하지만, 행동에 따른 제약은 다소 없어졌다. 주말에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항상 교회를 가야 했으므로 못하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주말에 놀러 가자고 했을 때, 나는 교회를 가야하므로 자연스레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억제된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신앙에서 비롯되어 주말에 교회를 나가야겠다가 아니라, 교회 때문에 주말에 다른 행동을 못한다는 것으로 내 신앙을 증명하려 했던 것 같다.

주말이 반복되며, 주말에 꼭 무엇을 해야된다는 압박감은 사라졌다.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꼭 내가 주말에 무언가를 해야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주변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니시는 여러 지인 및 친척 분들께서 나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우려, 걱정, 책망의 목소리.

사실 내 본질은 달라진 것은 없다. 더 성숙해진 것도 없으며, 더 퇴색된 것도 없이 그냥 ‘나’ 그대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는 교회를 안 다님으로써 달라져 있었다. 그 시선에 대해 처음엔 의아하고 당혹스러웠다. 나는 내 생각에 비추어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고 행동을 취한 것인데 그에 따른 주변 시선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러면서, 궁금증이 생긴다. ‘나는 변화 했나?’ 내 본질이 바뀐 것일까? 선택과 결정으로 행동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내린 선택, 결정 행동이다. 즉,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 결과로 인해 내가 ‘변했다’ 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한 사람에겐 다양한 지위가 있다. ‘다양한 지위’ 가 파생되는 이유는 어쩌면 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타인’ 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연인’ 이라면 ‘남자친구’, ‘여자친구’ 라는 지위가 발생하며, ‘가족’ 이라면, ‘아버지’, ‘어머니’, ‘장자’, ‘차남’ 등의 지위들이 생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편의상 누구를 호칭하는 대명사 일수도 있다. 내 ‘아버지’를 나타낼 단어가 아버지 성함으로 ‘홍길동’ 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즉, 대명사로만 존재할 수 있는 단어지만, 거기에 위치가 더 해진다. 이 위치가 더 해지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역할들이 있고 그 역할을 부여하는 타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향은 ‘변질된 유교’ 쪽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즉, 나는 어떤 역할을 수행 한 것 뿐인데 주변에서는 그것으로 지위를 부여하고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그럼 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때, 내가 그들에게 인식된 ‘그런’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내가 변한 것’ 이 된다.

그럼 ‘타인’이 부여한 ‘나’와 ‘자아’를 갖는 ‘나’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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