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 우리나라 청소년을 돌아본다

데미안
국내도서>소설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전영애역
출판 : 민음사 200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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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뭔가 읽을 책 없을까 하여 동네 도서관엘 찾아갔다. 눈에 확 띄는 책이 없었는데 ‘데미안’ 이라는 책이 보였다. 데미안이란 책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네이버 웹툰의 ‘싸우자귀신아’ 에서 였던 것 같다. 워낙 상식 밖 인간이라 그때 처음 데미안 이란 책이름을 접했는데 ‘아마도 어려운 어떤 책 인가보다’ 하고 넘겼다. 두번째로 이 책 이름을 접한 건 얼마전 읽었 던 ‘어학연수 때려치우고 세계를 품다’ 라는 책에서 였다. ‘아 이거 한번 읽어봐야지’ 했는데 우연찮게도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본 것이다.
덥썩 집어서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처음 이 책에 대한 생각은 어떤 철학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가 써 있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그만큼 단순히 어렵게만 생각했으며, 헤르만 헤세가 주인공인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책 뒤에 책소개를 위해 쓰여졌 던 강렬한 문구로 인해 ‘끝까지 읽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세계를 부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소 도전적이고 공격적이다. 하지만, 이 문구는 현재 내 상황과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너무나도 흔들어댔다.

싱클레어가 갈등하는 두 세계의 소개로 책은 장을 연다. 어렸을 적, 어른들의 시야와 아이의 시야는 턱없이 다르다. 그 작은 눈망울에 세계는 커보이며, 모든 것은 부모로 부터 보호된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내가 보는 세계는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에서 겪을 수 있는 세계가 전부였다. 집, 배추밭, 큰 밤나무들, 개울, 학교, 등 이것이 내가 보는 세계의 전부였다. 이 공간 속에서 나는 부모에게 의지해 때론 친구들과 놀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어느덧 의식의 고리가 잡히면서 나는 사고를 하게 되었고 무언가 고민하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생겼다. 사물에 대한 이해라는 걸 사고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데미안에서 보였듯이 나도 어두운 세계를 돌아보자.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이다. 점심 시간 후 우연 찮게 친구들이 다 밥을 먹으러 간 시간, 내 친구 한명이 다른 친구들 가방을 뒤지며 도둑질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동참하게 되었고 친구들 가방에서 돈이나 장난감들을 훔쳤다. 조만간, 이 사실은 선생님께 알려졌고 내부 고발자로 인해 결국 5~6명의 아이들이 선생님께 혼이 난 기억이 있다. 이 때 당시만 해도 세계의 구분은 없었다. 그저 욕심이라는 마음 속 꿈틀거림으로 인해 저지른 일이었다. 그 후, 3학년으로 진급해서 다시 도둑질을 했다. 이번엔 간 크게도 농협마트에서 도둑질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도 샤프, 지우개, 볼펜들을 훔쳤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도 아니었는데 왜 이런거에 욕심냈을까. 우리의 범행이 2~3번 이상 계속되자 결국 농혐마트 직원분이 학교에 이 사실을 알렸다. 선생님은 우리반 전체에게 자기가 잘 못한 것을 종이에 적도록 시켰다. 우리들은 반성하였고 이내 그 종이는 난로에 불태웠다. 

이전에 내가 보호 받던 세상과는 다른 경험을 했던 것이다. 나는 마음의 두려움을 느꼈으며, 부모님께 한 거짓말로 인해 스스로 상처를 입었다. 더불어, 내가 어렸을 당시 우리 가정은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싸움을 본 느낌은 충격적이었다. 세계가 갈라진 느낌을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극도의 긴장 상태와 불안감만이 존재했다. 

싱클레어가 어렸을 때 첫 죄악으로 인해 어두운 세계를 발견한 느낌은 성인인 내가 나의 어렸을 적을 돌아보았을 때도 너무 잘 묘사되어 있었다. 그 세계의 흔들림, 새로운 세계의 등장이 절묘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그 압박감과 족쇄로 묶이는 듯한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연약한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어떤 존재일까. 책을 읽는 초반부 까지는 도대체 가늠할 수 없었다. 이것이 판타지 장르의 책인지. 갑자기 나오는 독심술에 관한 이야기들. 많은 의문을 던지는 데미안. 하지만, 결코 지배하지 않는 ‘그’에 대한 혼란 속에 싱클레어 역시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데미안이 말한 새로운 관점들. 기존에 싱클레어가 갖고 있던, 진리라 믿었던 모든 것들을 흔드는 새로운 관점들. 싱클레어의 혼돈은 ‘사춘기’를 접하고 ‘성욕’에 눈을 뜰 때 가속화 되었다.

우리나라는 다분히 변질된 유교적이다. 정신은 사라졌으며, 격식만이 남아버렸다. 사라진 정신 속에 격식으로 인한 정신의 재생산은 극히 어렵다. 때문에, ‘성’ 에 대해서도 상당히 방어적이다. 감추는 것이 많으며, 눈을 돌리는 것도 많다. 최근에는 파격적으로 이런 정체된 상황을 깨는 흐름들이 여럿 존재한다. 여기서 밝혀야할 것은 ‘성’에 대해 진취적인 것이 곧 ‘문란’한 것은 아니다. 급격한 ‘성’에 대한 개방으로, 이에 대해 혼돈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싱클레어가 ‘성욕’에 대해 갈등하는 부분도 이러한 ‘성’에 대한 개념의 방어적인 관습 때문이다. 왠지 그것은 ‘악한’ 것에 속한다. 때문에, 싱클레어는 자신이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을 느끼며, 그것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자신과 씨름한다.

‘사춘기’ 때엔 너무도 많은 세계가 순식간에 부서진다. 갑작스러운 세계의 부서짐에 놀란 청소년들은 방황하게 된다. 때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지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 단지 어른들 끼리 사소한 정치적, 행정적 입씨름으로 청소년을 더욱 방황케 한다.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도 ‘사춘기’ 에 대한 대응책으로 ‘검열’이란 방법을 사용한다. 이미 아이들은 많은 것을 여러 방법을 통해 알게 되는데 정식적인, 안정적인, 신뢰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다.

포털사이트에 ‘자지’, ‘보지’, ‘자위’, ‘섹스’ 등에 대한 단어 검색을 해보았다. 대부분의 포털 사이트는 ’19금’ 이라는 단어와 ‘성인인증’ 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검열’은 요식행위일 뿐이다. 이런 루트 말고 ‘성’에 대한 불법적인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다. 다만, 겉으로는 다들 모른 척 할 뿐이다. 

‘성’에 막 호기심을 갖는 청소년 보다, ‘성’에 더 많이 알고 있는 척 하는 ‘성인’들이 더욱 더 ‘문란’하고 ‘저열’적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청소년을 ‘검열’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한 상황이다.

싱클레어는 자연스러운 변화 중 하나를 겪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도 어렵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이것은 ‘악한’ 것으로 분류된다.

사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겪는 성장통에 대한 부분은 많은 부분이 공감되며, 그것을 이해 할 수 있었지만, 이 성장통을 헤쳐나가 안착하는 과정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다. 후반부로 접어 들수록 싱클레어 내면의 완성 단계가 모호하며, 어려웠다. 

하지만, 마지막에 싱클레어가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라는 대목을 통해 데미안이라는 존재는 싱클레어가 이상으로 삼는 자아이며, 그 자아는 성장을 통해 성인이 된 자기 자신의 자아라는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해 싱클레어가 불완전한 청소년기를 넘어 인격체가 된 것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싱클레어의 성장통을 보며, 나 자신과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을 본다. 중간에도 다소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올바른 성장통을 겪지 않은 청소년이 많은 것 같다. 나 자신도 제대로 성장통을 겪은건가 의문스럽다.
성장통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이 과정은 알을 깨는 과정으로, 그 과정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올바른 성장통은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비틀어져 존재한다. 가장 자아에 예민하고 세밀해 지는 시간에 우리 청소년들은 ‘닥치고 공부’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공부라면 적극적으로 응원할 의사가 있다. 하지만, 그 공부라는 것이 청소년을 멍청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이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려는 아기 새의 알 껍데기를 테이프로 동동 감아 놓고 살짝 구멍난 곳에다 그네들이 말하는 ‘상식’이라는 범주의 ‘공부’를 그 ‘작은 구멍’만을 통해 스포이드로 주입한다. 아기 새는 주입해 오는 그것이 세계의 전부로 착각한다. 그리고 이 기간이 너무도 길어졌다. 12~19살 사이에 일어나야 할 성장통이, 억제되어 20살. 늦게는 30살 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청소년을 어른들은 ‘검열’이 아니라 ‘신뢰’로 다뤄야 한다. 자기 자식에겐 그토록 신뢰적인 사람들이 왜 남의 자식은  후레자식으로 보는 것인가. ‘시선’이 때로 사람을 만든다. 요즘 뉴스에 불량한 청소년들에 대한 이슈들이 나올 때, 그 아이들을 불량하고 쓰레기 같은 자식들로 치부하는데 몸서리쳐진다. 그 아이들은 누가 교육시켰으며 어느 가정에서 자라났는가. 다 우리네 아이들이며, 우리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문제의 근원은 ‘본인’ 에서 나오는 것을 항상 상기시켜야한다. 그러므로 바꾸어야 할 것도 ‘본인’ 이다. 

한가지 사실은 청소년들이 ‘어른’ 이라고 부르는 인격체도 결국엔 ‘새로운 성장통’을 겪는 인격체라는 것. 나 또한, 마찬가지로 겪고있다. 그 과정 중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투쟁을 멈추는 순간 썩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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