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의미

      얇고, 가볍고, 싸고, 뻔한 내용의 책이다. 아니, 저자가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고 프랑스 문단의 주류라면 획기적인 내용이랄 수도 있겠다. 결국 이 책의 내용이란 게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뻔한 내용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다시 말해 논란의 소지가 있는, 책을 읽는 자세 혹은 옳은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역시 내가 적어 내려가게 될 나의 생각도 논란의 소지가 많을 것이다.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한 책이다. 사실 이런 내용이 읽어볼 만한 가치로써 충분하면 안되는 건데 말이지. 그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면 하는 바람의 내용들이다. 


      내 입장에서는 저자의 생각과 내 생각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의 정의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뻔한 얘기였고 탁상 공론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방식은 (내가 말하는 방식도 포함하여) 탁상공론이다. 즉, 의도는 좋되 조직 시스템하에서는 이룰수 없는 듣기 좋은 뻐꾸기나 다름 없다는 얘기이다. 물론 독서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개인적으로 지인에게 말해줄 때는 나도 저자처럼 얘기한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내가 얘기하는 것처럼 독서를 한다. 어떤 면에서 독서에 대한 생각은 내가 저자보다 훨씬 더 열려있다고도 볼 수 있고 그 얘기를 바꿔 말하면 독서를 무슨 만병지식통치약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보기에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점의 시작이 다르다. 일단 나는 책이 음악이나 영화나 기타 다른 문화적인 요소의 창작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에 대해 그다지 동조하지 않는다. 혹자는 책 한 권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수도 있다고 한다. 잘못된 얘기이고 단편적인 얘기이다.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꾼 게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내재돼있는 어떤 변화의 요소가 책을 계기로 해서 바뀌었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그게 그 얘기 아니냐고? 천만에. 세상에는 뭉뚱그려서 판단하면 좋을 일이 있고 그 반대의 일도 있다. 앞선 얘기의 경우 정확히 구분하지 않고 얘기가 전해지고 그런 경로를 통해 책이 본래의 가치보다 더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린, 마치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은 지식인이고 안 읽으면 그렇지 않은 대열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크게 보자.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게 책만 있는게 아니다. 음악 하나로도 바뀔수 있고 영화 한 편으로도 바뀔수 있다. 유독 책만 그런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책은 필요이상 과대 평가를 받고 있고 그 때문에 음악이나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는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만큼의 인기를 못누리고 있다. 정화수를 떠놓고 정중한 자세로 기도를 해야한다면 결국 기도하는 회수가 줄고 말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리뷰를 쓰다보면 웃기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떤 책에 대해 혹평을 썼을 경우가 그 한 예이다. 그것은 역자나 저자가 직업에 대한 특권 의식을 지닌 듯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웃긴다.


      우리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을 때 좋고 나쁨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를 한다. 그 작품들에 대한 평을 리뷰로 혹평을 했다손 치더라도 영화 감독에게 이메일이 오거나 작곡가에게 이메일이 와서 왜 그렇게 혹평을 썼냐고 따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독 책만 보면 그런 인간들이 있다. 솔직히 나는 그런 점을 좀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관련자가 영화 혹은 음악계의 창작자보다 우월하고 높은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어이없다.


      한 번은 그런 이메일을 받아서 내가 답장하기를, 내가 신발을 사서 디자인의 나쁜 점에 대해 상품평을 올렸다고 해서 그 디자이너가 이렇게 항의하는 경우를 처음 당한다고 말했다. 그게 자신의 경우와 같냐고 그가 내게 되물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당신이 신발 디자이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내게 설명해보라고. 그랬더니 온갖 잡소리를 늘어놨다. 요점은 자신이 더 어려운 말을 구사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산업 디자이너의 창작보다 자신의 창작이 더 가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작가들이 그렇게 이상한 우월의식을 가진 것은 아마도 앞서 말한 책에 대한 대중 인식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작품의 작가는 그 작품이 신발 디자인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다 똑같은 창작자이고 그중에서도 뭔가 대단한 게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칭송을 받는 것이다. 위대한 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뭐가 됐든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단지 위대하게 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은 아닐텐데 그런 착각을 하는 인간들이 이 문학계에는 유독많다. 대상이 책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책이 지식이라는 편견과 언론이 말하는 지식인이 마치 리더처럼 돼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세상에 더 필요한 건 지식보다 지혜이다. 그런데 소위 지식인라는 자들이 지혜로움에 배반적인 행동을 많이들 하고 앉으셨더라.  


 


      나는 이제 곧 마흔을 바라보고 16년간 사업을 했으며 1년 평균 250권정도의 책을 보고 40여개에 가까운 나라를 여행했다. 지금 나열한 이런 나의 인생 중에 내가 습득한 지혜의 대부분을 책이 주었는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책이 준 부분도 있다가 정답이다. 다시 말해 책만으로는 절대 우리가 지향하는 현명한 삶의 완전함을 구현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멋진 요리처럼 각각의 요소, 경험, 사람, 책, 여행, 음악, 미술, 영화, 철학 이 모든 것들이 적절한 비율로 잘 배합됐을 때 최고의 맛을 내는 경우와 비슷하다. 다시 말해, 너무 책을 안 읽어도 좋을 게 없고 너무 책만 읽어도 좋을 게 없다는 얘기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들은 정말 많다. 이 모든 것이 알맞게 잘 조합돼야 그 각각의 요소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다른 요소는 차지하고 경험과 책의 조합만 보더라도 그렇다. 사람들은 책을 통해 얻는 무엇인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흡수하기 위해 해야 할 것으로 정독을 꼽는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될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백 날 정독해도 모르는 걸 눈알이 빠지게 본다고 해서 이해가 될 것 같은가? 천만에 말씀이다. 어떤 책들은 반드시 그만큼의 삶의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이해 혹, 공감할 수 책들도 있다. 결국 그것은 정독의 문제가 아니라 책의 행간을 한 방에 납득할 수 있는 삶의 경험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얘기이다. 지독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지독한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소설에 깊게 몰입하기 힘들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작가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글자로 표현된 것 이면의 것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단편 소설에 대해 감동하지 못한 이유를 수업시간의 분석적인 감상법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론 그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경험이다. 어느 소설에서 말한 행간의 슬픔 혹은 고뇌가 그땐 몰랐는데 살아보니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 후에 그 소설을 다시 접하게 되어 느끼는 가슴깊은 공감이 정독을 하지 않았거나 분석적이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나는 지인에게 말한다. 더 많은 책을 통해 더 많은 감성과 더 많은 이해와 더 많은 지혜를 얻고 싶다면 더 많은 경험을 하라고. 경험과 책이 조합되지 않으면, 책만으로 얻을 수 있는 이해는 한계가 있다. 책만 읽으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굉장한 편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삶을 걸어온 학자 중에서 그렇게 앞 뒤가 꽉 막힌 교수 양반들이 내 주변에도 널렸다.(더 웃긴 건, 학자가 아님에도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도 많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침튀겨가며 학생들에게 설파하다가 그보다 더한 고수, 교수가 가르치는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파병의 경험으로 인간의 잔혹한 삶을 겪고 돌아온 사람 앞에서는 꿀먹은 벙어리나 다름 없는 경우를 수없이 봤다. 유명한 MBA 경제학자 교수중에서 위기에 빠진 기업을 살려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제로였다. 그들은 강 건너에서 불 끄는 법에 대해서만 연구했기 때문에 눈앞에서 화염이 울렁거리면 앉아서 토하기 일쑤였다. 물론 전부 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외도 있겠지. 그러므로 학문보다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절한 배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봤으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이 없더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물론 유명한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저 문구를 책이 최고다라는 말을 알리기 위해 이용하기도 한다. 경험은 미숙하고 얄팍한 지식으로 삶을 이해하는 이들이 자주 저지르는 오류도 바로 저런 식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합리화의 도구 이상은 아닌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저 말을 남긴 사람은 노령의 학자이다. 얘기의 포인트는 “도처의 쉴 곳을 찾아 봤다”는 데 있다. 그랬더니 책이 있는 구석방이 최고더라라는 얘기이다. 책이 있는 구석방이 최고인 것을 알게 된 이유가 바로 경험이라는 얘기이다. 즉, 결국 책이 최고니 그 전에 것은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가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미성숙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오독이고 그릇된 편견을 가지게 만드는 함정이며 자기 합리화의 첩경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책이 지식은 줄지언정 지혜를 주지는 못한다. 삶에 필요한 것은 지식 우선에 지혜다.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혜는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그 경험을 정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도구로써의 책이 뒷받침될 때 더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여전히,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절름발이가 절름발이인 것을 알 때는 벌어지지 않는다. 절름발이가 자신이 그렇다는 걸 모를 때 벌어진다. 그것이 전부인 진리라고 생각할 때 말이다.


 


      삶을 사는 과정 중에는 어느 하나만 해도 충분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 배움보다는 그 배움을 통해서 남은 삶은 더 가치 있게 만들고 후세에게 더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할 인생의 터닝포인트 말이다. 그런데 20대가 60대같은 삶을 살고 그런 사고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중간의 40년의 인생을 모든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지나고 보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일이다. 좋은 것이라고 무조건 먼저하는 게 좋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뭐든 가장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때가 있다. 친구와 어울릴 나이, 여행을 할 나이, 조직생활에 몸담고 사회의 음양을 지켜볼 나이, 그 모든 것이 때가 있다. 그럴 나이에 모든 것을 팽개치고 책만 파는 것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어느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몸 하나를 건사하는 것으로도 버거운 존재가 된다면 훗날 가정이 생겼을 때 혹은, 후배들에게 전해줄 지식이란 편견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책이 되려고 하는 책은 현명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활자로 기록해 놓으려는 산물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현명한 삶의 이야기가 19세와 21세기가 항상 같은 환경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기록된 현명한 삶의 이야기는 현재를 사는 삶의 참고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삶을 뒤로 하고 현명한 삶의 지식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보다 멍청한 행위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찌 현실도피적인 행위가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는가.   


 


      책은 놀이의 방편 그 이상은 아니다. 평생 책만 본 사람들은 나의 이런 얘기에 거품을 물수도 있겠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책 말고도 인간을 발전시킬 수있는 더한 삶의 지혜를 알게 해주는 방법들을 훨씬 많이 안다. 다시 말해 책만이 한 사람의 인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다. 즉, 놀이치고는 좋은 놀이에 속하므로 하면 좋은 거고 안해도 뒤처지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현명해지고 지혜로워기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 중에 하나로 책이 있는 거지, 책을 읽어야만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많은 사람들은 주와 부를 혼동한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보라, 죄다 옳은 얘기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왜 그 좋은 얘기를 우리가 알아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한 개인의 삶을 더 현명하고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귀결돼 있다. 그게 행복이든, 성취이든 말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써 책도 존재하고 문화도 존재하는 것이지 그 기본을 넘어서까지, 그러니까 스트레스와 중압감으로 작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그것이 주와 부가 바뀌어버리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었을 때 행복해야 한다. 슬픔을 느끼든 기쁨을 느끼든 그 모든 것이 어떤 나의 행복에 작용하기 위한 도구로써 쓰일 때 가치가 있다. 그런데 혹자들은 책을 읽어야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처럼 바꾸어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인문철학서만이 귀중하다고 여기는 자세가 그러한 태도 중에 하나이다. 너무 하나의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전체적인 줄기를 놓치고 만 꼴이다.


 


      한국인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접촉이 있었던 외국인을 만나보면 그들이 꼽는 첫 번째 한국인의 문제를 심각성으로 꼽는다. 너무 진지하다는 얘기이다. 너무 아유 레디 자세를 취한 사람이 많아서 때로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가 물론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어떤 하나의 사실을 웃었을 때, 자신이 웃게 된 그 원인에 대해서 너무 소홀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데 있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껏 엔돌핀을 생성시켜놓고 “그냥 킬링 타임용이야, 볼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든가 하는 행위이다. 솔직히 나는 이해도 못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서를 보는 것보다, 한동안 편하게 웃거나 몰입된 재미를 느낄수 있는 소설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 머리로 새겨지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게 없겠는가. 삶에 있어서 무게 있는 고뇌는 중요하고 재미있는 유머는 중요하지 않은가? 책을 통해서 한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간이 왜 낭비인가? 그 낭비된 시간에 얼마나 더 건설적인 개달음을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편견이다. 자신을 웃게 만드는, 혹은 즐겁게 만드는 도구들을 폄하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할 뿐더러 바람직하지 못하다. 


 


      책을 읽는데 어떤 방법을 논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반드시 취해야 할 방법에 대해 책만큼 심각하게 논의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기껏해야 그 작품을 더 잘 즐기기 위한 요령으로써의 얘기들 이상은 없다. 그러나 책만 유독 이렇게 해야만 한다, 라는 일종에 마치 그게 법칙이라도 되는 양 정해진 룰이 많다. 불필요한 울타리이다. 리뷰도 마찬가지다. 좋은 리뷰? 물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써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쓰는 이가 프로가 아닌 다음에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본인이 행복하기 위해서, 혹은 줄기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즉,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본인이 찾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남들이 짜 놓은 틀에 들어가기를 원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틀에 맞추어야 그게 바로 좋은 상품인 것마냥 얘기한다. 자유로울수 있는 권리를 줘도 울타리로 들어가려고 하고, 울타리를 짜 놓으면 또 그게 문제라고 말한다. 그들은 평생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준이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몰라서 방황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철학, 미술, 음악, 영화, 문학, 과학, 기타 모든 요소에 우선 하는게 무엇인가. 바로 보다 나은 삶이다. 그 하나를 위해 앞서 나열한 분야들이 발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의 순서가 뒤바뀌는 순간, 끌려가게 될 것이다. 현명해지려고 멍청한 삶을 사는 어이없는 경우가 되겠다. 오늘 멍청한 삶에 투자하면서 내일 현명해지기를 바란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책은 그저, 책일 뿐이다. 나가서 친구들과 놀 시기에 책만 보는 것은 앉아서 게임만 하는 경우와 별다를 거 없다. 오히려 게임만 하는 아이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똑똑하다는 착각은 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활자가 지능에 미치는 효과라든가 하는 미세한 부분은 말하지 않겠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은 굉장히 여러가지이고 그중 책이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지식이 곧바로 지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삶을 진지하게 상대하는 용기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좋은 표본이 될 것이다.     


     그 많은 방법중에 유난히 책만 더 높은 가치를 평가 받고 있는 것은 분명 과장된 것이다. 영화를 보듯, 음악을 듣듯, 여행을 하듯, 책도 그렇게 대하면 그만이다. 그게 시작이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가깝게 책을 느낄 때 책도 책으로써의 부담감을 덜 수 있고 적당한 평가를 받으며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것이라고 의무감을 갖는다고 해서 더 많은 책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뭐든지 자발적인 인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상 강력한 힘이 있겠는가. 책을 책 이상 무슨 올바른 의미를 따지고 드는 자체가 불필요한 과정이고 그것은 오로지 책 말고는 아는 바가 없는, 그래서 마치 인생의 유일한 솔루션이 책밖에 없다고 여기는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은 인물들이나 그러는 행동이다.


      인문 철학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고, 추리 판타지 소설은 소품이고, 고전을 읽어야 지혜가 생기고, 역사를 알아야 하고, 느리게 읽어야 하고, 정독을 해야 하고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아직 인생의 단면밖에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의 다양한 경험이 미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다 할 수 있으면 다 하는게 좋고, 다 할 수 없으면 본인이 하고 싶은 걸하면 된다. 그래야 나중에 시간낭비했다는 생각이라도 안 하지. 인간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때가 되면 본인이 알아서 필요한 걸 섭취하게 된다.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필요를 느낄 때가 온다는 얘기이다.


      느리게 읽어야 할 책이 있고, 빠르게 읽어야 할 책이 있고 정독해야 할 게 있고 반대인 게 있고 당연히 그런 것이다. 거기서 뭐 하나의 정답적인 방법을 찾는다는 자체가 인생을 사는 방법이 단 하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 얘기이겠는가. 내가 아는 절륜한 내공을 지닌 어르신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단편적인 정답을 내려 말하는 양반들이 없다. 항상 먼저 전제 조건을 확인하는 것이다. 환경 말이다. 그 중요한 조건을 무시한 채 뭐는 이렇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당연히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조합을 중요시 한다. 반대로 앞서 말한 책에 편견을 마치 신앙처럼 설파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경험이 미숙한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더 단편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많이 보았다. 점점 더 우물안에 개구리가 된다고나 할까? 삶의 다양한 요소를 경험하지 못하고 오로지 책만으로 인생을 깨우친 사람들이 항상 책의 대한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물론 많은 선구자들이 그들과 같이 책을 권하지만 거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주,부의 구별이다.


 


      나는 책에서 어떤 특별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는 자세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편한 마음으로 즐기자고 봐도 느낄 건 다 느끼고 받아들일 건 다 받아들인다. 마치 무슨 시험 준비하듯 읽는다고 해서 더 많은 걸 깨닫지는 않을 거란 얘기이다. 얻게 될 것은 때가 되면 자연스레 얻게 된다. 판타지를 보다가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여행을 하다가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읽어야 한다니까, 오로지 그렇다니까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 1년내내 들고 있고 그러면서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바보같은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다. 반면 이해하고 그게 정말 재미있으면 그걸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어려웠던 철학서들이 삶에 다양한 경험의 토대없이 100% 이해하기란 게 불가능할 거로 여겨진다. 경험을 하고 다시 읽었을 때 믿기지 않을 만큼 쉽게 이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어차피 시간이 지니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때가 되어 십분이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부터 100일씩 고민할 이유가 없다. 100일을 고민하느라 놓친 일 중에는 세월이 흐르면 하지 못하게 될 일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땐 그게 더 중요하다. 그 경험이 결국 훗날 더 좋은 책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즐거운 놀이 도구의 한 방편 이상은 아니니, 거기에 이상한 의미를 추가로 달아 자신의 지식을 합리화할 필요 없다. 그러므로 내가 년 250권을 읽는 것이 내세울 일도,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그 이하 혹은 이 이상도 마찬가지고 또 그런 이를 보면서, 우와 라고 감탄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나는 단지 지금의 나에 삶에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독서인 것이고 그 이전에 그보다 재미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많은 놀이도 해보았고 새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할 나이가 되었고 안정된 생활에서 가장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게 독서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므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3살 어린아이도 그 아이가 좋아하는 건 1년 내내 할 수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게 대단하다는 것 자체가 편견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굳이 좋은 평가를 하자면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뭔가를 그렇게 꾸준히 한다는 성실성에 대한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을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좀 오버라는 게 내 생각이다. 

      책은 읽고 싶으면 읽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책보다 더 좋은 게 많고 그걸 찾았다면 그걸 하면 된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 중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딱히 그런 게 없다면 읽어서도 나쁠 게 없는 것이니 읽으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마는 정도다. 책이 어떤 대단한 인생의 깨우침을 줄거라는 편견부터 버리자. 본인이 어떤 일에 무슨 깨달음을 얻는다면 본인 내면의 자아가 그런 변화를 깨달을 준비가 됐기 때문인 것이다. 그 매개가 무엇이 됐든 말이다. 준비도 안된 자아에게 책이 난데없이 엄청난 지혜를 주는 일이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없다. 

      예전 개그 프로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필이 충만할 때, 그때 하란 말이야.”  

출처 : yes24 회원 리뷰 글 중… vitojung 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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